뿌리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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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유래

昌寧曺氏始祖誕生과得性由來
昌寧曺氏始祖誕生과得性由來

始祖母 諱 禮香은 新羅 二十六代 眞平王 때에 新羅 翰林學士 李光玉의 딸로 태어나면서부터 腹病이 있어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하였으나
백약이 無 效이던 차에 어느 날 스님이 찾아와 이르기를 昌寧 火旺山 龍池에 가서 沐浴齋戒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을 볼 것이라는 말에
火王城 龍潭에 가서 沐浴하고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雲霧가 일어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몽롱한 지경에 정신을 잃었다가 얼마 후 雲霧가 걷히면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는데 그로부터 복병은 씻은 듯이 완쾌되고 태기가 있었다한다.


그 뒤 아들을 낳았는데 脇下에 “曺”字와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하루는 꿈에 丈夫가 나타나서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는가?
나는 東海 龍王의 아들 玉玦인데 이 아이의 아비이다.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 사실을 始祖母 禮香의 아버지 이광옥이 신라 眞平王에게 아뢰었는데 王이아이를 접견하고 보니 相貌모가 特異하고 脇下에 “曺”자의
글 무늬가 있음을 보고 姓을 “曺”라 賜姓하고 이름을 “繼龍”이라 지어주었다 한다.
그로부터 成長하여 眞平王의 駙馬가되어 新羅 太師 昌城府院君 飮葛文王에 封하니 昌寧曺氏의 始祖이시다.


벼슬은 輔國大將軍上柱國 大都督指揮都軍事를 거처 駙馬都尉 王位를 계승할 太子太師 昌城府院君에 封하여졌다. 그리고 夫人이 善德女王으로서
眞平王의 뒤를(632年 52歲)계승하자 新羅에서 王의 配偶者 등에 限하여서 王室에서 追封하여주는 飮葛文王(634年 63歲)으로 封立되었다.
이와 같이 昌寧曺氏의 始祖는 出生 說話와 得姓綠由가 우리 韓國 古代史의 建國史話에서 볼 수 있는 神異에 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昌寧曺氏請澗公派譜및鼎山祠誌參照>



昌寧曺氏始祖 新羅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墓壇碑銘飜譯
昌寧曺氏始祖 新羅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墓壇碑銘飜譯

하늘과 사람은 嚴然히 갈라졌으되 往往 그 정기가 造化하여 降생하는일이 있으니 하늘이 보낸 제비알을 먹고 태어난 商의 시조라든가
上帝의 큰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였다는 周의 시조 일따위는 詩經雅頌篇에 실려 전하니 전혀 허황하다 못 할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큰박에서朴氏가나고 鷄林에서金씨가나고 金盒합에서 首露王이 나고 제주 土穴혈에서 三姓이 난일이 이런 것인데
蘇子瞻이 일찍이 神人의 誕生이 凡人과는 다르다 라고 말한것이 바로 그런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曺氏始祖가 龍池에서 난 이치도 꼭 같은것이리라.


조상과 후손이 비록 육신은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저도 그 氣脉은 하나로 이어져 祭祀의 香燭과 꿈자리에서 感應이 千百年이 지나도 어긋남이 없다
이제 始祖公이 澹雲公의 꿈에 나타나신 것을 보아도 그 이치는 조금도 怪괴異한 일이 아니다

처음에 曺氏始祖墓가 너무 代가멀어져 失傳하였다가 澹雲公이(諱命敎墓加平外西面) 일찌기 꿈에 한 祠堂에 들어가니 사람소리로
어찌 내碑를 세우지 않는가 하기에 두루 살펴보았더니 山밑에 한 古塚총이 있고 그 위에는 풀이 茂盛하며 그 아래 흙색은 모두 붉은데
앞에 있는 큰 돌에 曺繼龍이란 三字가 쓰여 있어 始祖墓 인줄을 알고 惶悚히 놀라 그쪽을 向하여 두 번 절하고 깨어보니 바로 꿈이라
心中에 奇異하게여겼더니 마침 永川사는宗人 善迪적의 글에 우리始祖의 墳墓가 慶州草堤里 에 있다

옛부터 曺氏 始祖墓라 알려 저온 이 墓는 兵亂을 겪는 동안 잊어버렸으나 어쩌다 境內를 侵犯하는者가 있으면 갑자기 異變故가 생기므로
오늘까지 골 안에 人塚총이 없었다는 말이 있고 뒤에 또 和順사는 宗人善行의 舊譜에도 始祖墓가 慶州府 北四十里밖 紫玉山밑 草堤座原에 있다하였으니
앞의 善廸의 글은 그 地方 사람들의 傳說에 따른 것이고 뒤에 善行의 譜牒은 先代의 紀錄에서 나온 것인데 두 가지가 꼭 符合하여
조금도 差錯차착이 없으므로 마침내 嶺南宗人들이 현지를 살펴보니 그 地形土色과 墓域坐向이 꿈에서 본 그대로이므로封墳을 改修하고
樵牧초목을 禁戒금계 하여 지금까지 傳하여왔다 대개 生民의 始初가 저렇게 神秘로와 精魄정백은 반드시 그 肉身과함께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
澹雲公은 文章과 德行이 온世上 模範이되고 天資가 虛名冲澹하여 能히 神明과 交應할만한 끝없이 虛靜하고 恬愉념유하여 太初와 이웃 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가까 왔으므로 祖孫의 靈魄백이 은은한 가운데 聲容으로서 接할수있는지라 이었지 例事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옛날 柳子厚가쓴 襄陽趙丞의 墓誌에 그 아들이 들에서 울고 있는데 눈이쑥 들어가고 수염이 많은 사람이 나타나 自己의 姓이 趙라하면서
그 아이 아비 무덤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그 지극한 孝誠에 感動한 神이 그 같은 모습으로 假託하여 알린 것이니
千年前後의 事實이 이같이 들어맞은 일은 참으로 神奇하지 않은가

當時 澹雲公이 너무 늙어 몸소 省墓를 못하고 훗날을 기약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뒤에 그 孫子 晦회振이 公의遺志를쫓아 千里를 다니며
同道의 諸孫을 불러 모아 앞의 顯夢事實을 質定하고 또 영천에서 나온 글과 和順에서 얻은 譜牒을 證驗하고 다시 見聞를 參考하니 모두 合符하는지라
마침내 掃墳告祭하고 全國諸孫과함께 墓壇을 모으고 碑를 세우니 澹雲公이야말로 훌륭한 孫子를 두었다 할 것이고 當時 今尹 兪漢模는
公의 外孫이었는데 地主로써 이 役事를 잘 도우니 또한 外孫노릇을 훌륭히 하였다 이를만하다.


삼가 曺氏世譜를 살피건대 始祖의 母堂은 新羅 翰林 李光玉의 따님인데 아기 때의 속병이 자라면서 더욱 痼疾고질이라 사람들이 昌寧 火旺山 龍池가
매우 靈異하다는데 가서 빌어 보라하기에 沐浴齊戒하려고 못가에 이르니 갑자기 雲霧가일어 대낮이 캄캄하다가 이윽고 안개가 걷히면서
病은 낫고 그로부터 胎氣가있어서 禮香氏꿈에 한 丈夫가 와서 말하기를 나는 東海神龍의 아들인데 이름은 玉玦바로 이 아이 아비라
반드시 아이를 잘 돌 보아라 크게는 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며 子孫萬世가 明玉같이 빛나리라고 하였다
그 事實을 眞平王에게 秦上 하였더니 王이 公을불러본즉 相貌가 特異하고 겨드랑에 曺字 같은 글 무늬가 있어 그로써 姓名을 내리셨는데
자라서 公主를 아내로 삼았다 일찍이 언젠가 倭寇가 東萊를 侵犯하였을때 王이 公으로하여금 軍卒로 막게 하니 單騎로 敵陣에 나아가 곳삐를 부여잡고
차근차근 타이르니 倭人들이 업드려 公은 天人이시다 하고서는 軍隊를 撤收했다고한다 이 事實이 비록 正史에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오래토록 傳하여
내려온 이야기 조금도 無稽계하다 못할 것이다 이후 子孫이 크게 繁昌하여 여덟분의 平章(高麗正二品)아홉분의 少監(高麗從四品)벼슬이 연달아 났으니
우리나라에 曺氏姓가진 사람은 다 그 后裔예라 澹雲公의 諱는 命敎로 벼슬이 天官少宰 藝文館提學에 이르렀던 분으로 眞平王時와는
千二百年의時代 相距있더라 豊山洪良豪는 이런 事實을 듣고 神異롭게 여겨 여기에 澹雲公의 記錄과 이 地方사람들이 傳하는바를 記述돌에새겨
멀리 百世後에 까지 라도 여기가 曺氏始祖의 墓所임을 알리게 하는데 있어 이글을 封墳에 새기지 않고 따로 壇에다가 새기는 것은
愼重을 다함에 서라 기리어 새기노라.



英祖 三十三年 丁丑 十月 日立 豊山洪良浩謹撰/後孫 馨純謹譯

(在位1724-1776 ∴1724甲辰+33年=1757年丁丑年)


靈蹟碑&得姓之地碑(1892&1898年)




昌寧曺氏得姓龍池(창녕읍옥천리산322)




始祖 繼자龍자(始祖太師公墓壇碑銘)




種德齋正堂(경상북도문화재자료제91호)
주소:경상북도경주시안강읍노당리1115-2